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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경북 이야기보따리 수기 공모전 동상 수상작…`하옥계곡, 그 포근한 숨길 / 김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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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재 작성일19-10-13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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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신문=장성재기자] 하옥계곡, 그 포근한 숨길 / 김인현

 자연을 좋아하는 내 여행에서 초화가 빠진다는 것은 섭섭한 일이다. 그동안 벼르고 있던 포항 근교의 청하면에 있는 「기청산식물원」과 그 길에 연장되어있는 산굽이 언덕의 「경상북도수목원」을 향한 여행길을 잡는 것은 매우 마음에 드는 일이었다.
 그 여행길에서 하옥계곡을 우연히 발견하였을 때, 나는 당장에 나의 유랑이 끝난 느낌을 받았다. 더없이 안주하고 싶은 곳, 그런 풍경이 가득한 곳, 또는 낭만의 취향이 살아나는 곳. 내가 바라 본 하옥계곡은 그런 곳이었다.
 
 하옥계곡은 죽장면 상옥리의 내연산 자락에서 시작되어 천연의 숲과 냇물, 그리고 비포장도로를 한꺼번에 끌어안고, 아련한 서정이 숨 쉬던 옛 향기를 물씬 풍기며 북쪽 영덕으로 긴 숨길을 내뱉고 있었다.    물결은 끊임없이 변형하며 깊고 가파른 지형에선 커다란 바위와 어울려 아버지처럼 웅장한 소리를 내며 흘렀고, 넓고 평편한 지형에서는 흰 자갈들과 모래를 품고 어머니처럼 고운 소리를 내며 흘렀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기타를 치며 인생의 여정을 노래하는 집시의 모습들이 나타나는 야영지가 어느 곳에나 호젓하게 펼쳐져 있기도 했다. 

 나는 당장에 야영을 하고 싶었고, 조금 후 특히 마음이 끌리는 곳을 야영지로 지정했다. 모래사장 위였다.
 새삼스런 의미는 없지만, 나는 별을 좋아한다. 특히 홀로 야영을 하는 탓에 심중의 말 한마디 나눌 수 없는 지경에서는 별이 제격이다. 바라보이는 별의 수만큼이나 많은 상념의 대화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옥계곡 같은 오지의 하늘에 열린 해맑기만 한 대기 속에서라면,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와!”라는 단 한마디의 탄성만으로도 무한한 생명의 축복이 일어난다.

 때는 9월. 계절은 울긋불긋한 피서객들을 보낸 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울긋불긋한 가을을 서서히 불러 모으고 있었다. 공기는 이미 수정처럼 신성해졌고, 하늘은 순정처럼 해맑았다. 그 기색은 밤이 되어 유난히 무수한 별들을 띄우고, 또 유난히 반짝이게 할 것이었다. 그 풍경을 놓칠 수 없는 내가 다소 넓은 모래사장 위에 야영터를 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까운 근처에는 널따란 반석이 산에서 곧장 뻗어 내려와 맑은 물속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옆에는 더욱 웅장한 바위가 높다랗게 치솟아 있어, 작정하고 별을 바라볼 수 있는 장소로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에 마음의 흥겨움이 더해졌다.

 천년만년을 살듯 조금 위쪽 길에 세워놓은 지프차에서 야영장비란 장비는 죄다 들어내어 모래사장에 쌓아 놓았다가, 이윽고 오랜 고성처럼 단단히 야영채비를 이루었다. 그리고 땀을 식힐 겸 물 속에 발을 담근 직후, 곧장 그물을 저어 피라미들을 쫒았다. 피라미들이 놀랍도록 많은 탓에 금방 라면에 들어갈 몇 마리를 잡았다. ‘어탕라면’을 끓여 먹는 식사는 매우 간단했으나 싱그러운 피라미의 활력을 받아들여선지 땀이 흐를 정도의 포만감이 전신을 감싸고돌았다.

 그동안 노을이 지자 하천 수면은 은빛이 되어 영속적인 어떤 아득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그 느낌도 잠시, 채 식지 않은 따뜻한 수온 때문인지 무수한 피라미들이 은빛 수면 위로 빗방울처럼 튀어 올랐기 때문에 경쾌한 마음이 생겼다. 덩달아 저녁 무렵이면 골목길에서 유난히 재잘거리며 뛰어놀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골짜기 전체를 채웠다. 하옥계곡에는 잊은 듯 찾지 않는 고향이 있었다.

 한동안 아련함이 밀려왔고, 그리움이 밀려왔다. 그것은 애잔한 슬픔의 징조가 아니었다. 고향에 안주하는 분위기, 평화로운 안식 속에 잠들어 가는 행복감이었다. 나는 그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무슨 아름다운 시구가 떠오르기를 바랐지만, 애당초 내 능력의 밖이었다. 결국 두어 줄 생각하다간 몸을 움칠하여 한동안의 분위기를 힘껏 밀어내고 말았다. 마치 어깨 위로 쓰러진 나무둥치를 밀어내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래도 단순하기만 한 것. 절망과 같은 한계점도 없었거니와 단절된 결승점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자연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내가 지닌 집시의 꿈이 야성적인 행위를 몰아붙여 모닥불을 피울 나뭇가지들을 여기저기서 주워 모으는 일을 했다. 물결에 씻긴 나뭇가지들은 자연의 땔감치곤 매우 고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깨끗하고, 가볍고, 부드러운 감촉을 주었다. 그 나뭇가지들은 매우 잘 탔고, 연기가 별로 없는 탓에 불길조차도 고상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불꽃 위에는 어느 덧 하나 둘 별들이 어렴풋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를 빛나게 하는 하늘의 바탕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짙은 쪽빛이었고, 그것은 유리처럼 투영해 보였다.

 그 심원한 빛은 지상의 것이기도 했다. 대리석 위를 또박또박 걸어가는 사랑스런 여성의 희고 가녀린 쇄골 사이에 걸린 에메랄드빛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지상에서 본 것은 하옥계곡 이곳저곳에 있는 웅장한 바위에 포옹된 깊은 물빛이었다. 그때 그 하늘의 빛은 지상으로 내려와 물속에 머물러 있었고, 그러다간 또 흘러가고 있었다. 그 전부가 내 눈에 들어왔지만, 나는 어떤 의미도 묻지 않았다. 모닥불은 환하게 피어오르고, 별은 반짝이고, 풀벌레는 맑게 울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흐르는 물결 소리와 함께 천연의 생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 의문이 들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야생의 낭만, 안식의 꿈이 매우 충족된 탓에 하옥계곡의 야영만으로도 여행일정의 모든 보람을 찾은 듯 했다. 계곡 주변의 초화까지 찾아보며 하루를 더 보낸 뒤 하옥계곡을 떠났다. 다시금 찾자는 맹세를 던진 것도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맹세는 몇 해가 지난 이 순간에도 너무나도 선명하고 분명하다. 
  청도 반시 축제를 다녀와서 / 목포 덕인고 2학년 5반 전대진

나는 낮선 곳으로의 여행을 좋아 한다.
중학교 다닐 때 까지는 주로 내가 사는 전남의 이 곳 저 곳을 돌아보았지만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방학과 주말을 이용해 그보다 먼 경상도의 축제와 관광지를 찾아 견문을 넓히고 있다.

  내가 지난 가을에 찾아간 산과 물과 인심이 푸르른 심청의 고장 청도는 경북 남부 중앙에 자리잡은 곳으로 동쪽에는 태백산맥의 지맥으로 불리워지는 운문산이 있고 밀양강 상류인 동창천이 남쪽으로 흐르는 고장이었다.

  청도 공설운동장이 가까워 오자 축제를 알리는 프랑카드와 함께 먹음직스런 반시를 매단 크고 작은 감나무들이 전남에서 찾아온 나를 반겨 주었다.

  내가 여행지로 결정한 청도는 가볼만한 곳도 많고 특산물도 많지만 여러 종류의 과일 중에서도 감을 남달리 좋아하는 나로서는 청도의 씨없는 반시를 떠올리면 입안 가득 침이 고인다.
아직도 꿈을 먹고 살아가는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영암의 시골 마을에는 어느 집을 들어서든 감나무 한그루쯤은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들판을 노랗게 물들인 유채꽃이 떨어지고 모내기를 앞둔 5월이 되면 감나무에는 수줍은 듯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있는 노오란 감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아침이 밝아 오면 별처럼 쏟아지곤 했다.
나는 떨어진 감꽃을 주워 그 속에 들어있는 개미를 털어내고 내 나이 또래 친구들과 감나무 그늘 아래서 꽃목걸이를 만들며 놀던 기억이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런데 청도에서 열리는 반시 축제에서 내 어린 시절 그렇게도 많이 먹었던 달콤한 홍시를 다시 맛보며 잠시 잊고 살아온 어린 시절의 추억 속으로 나도 모르게 빠져들 수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에서는 초여름 다가와 부실한 청시가 하나 둘 떨어지는 날이면 그 소리에 깜짝 놀란 개가 짖어대곤 하였다. 그리고 작은 단지에 소금물을 붓고 청시를 넣어두고 며칠이 지나면 감이 삭아 떫은맛이 없어졌는데 삭힌 감은 시골에서 살았던 나에게 우린 감을 꺼내 먹는 것이 최고의 간식이었다.

  가을이면 나뭇가지에 매달려 햇볕에 익어가는 홍시가 발산하는 선명한 주홍빛깔은 환상적이었다. 그 때문인지 고등학생이 된 나는 지금도 여러 색깔 중에서도 주홍색을 가장 좋아한다.
반시를 소재로 한 축제장 이곳 저 곳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돌아보고 잘 익은 반시를 먹으면서 나는 덞은 감을 홍시로 만들어 주시던 할머니 얼굴과 노란 감꽃을 가지고 놀았던 고향 친구를 떠올려 보았다.

  내가 어린 꿈이 뛰놀던 시골을 떠나 목포라는 항구도시에서 살고 있듯이 지금은 아련한 추억 속에서 어디서 어떻게 살고 사는지 소식조차 알 수 없는 친구들도 나처럼 청도의 반시 축제를 찾는다면 아련한 기억 속에서 풋내나는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릴 것만 같았다.

  가을이 무르익은 10월의 한가운데서 반시의 계절을 맞은 청도는 눈길이 닿는 곳마다 주홍색 감이 탐스럽게 매달린 감나무가 눈에 띄고 집안에는 물론 들판과 가로수도 감나무 일색이라서 감나무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왔다.

  해마다 가을이면 주홍색의 반시가 되는 감은 청도를 상징하는 특산물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내가 맛본 청도 반시는 씨가 없고 맛이 달아 추운 겨울날 할머니가 몰래 꺼내주던 홍시의 맛이 그대로 입가에서 되살아났다.

  감나무 사이를 지나 축제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시골집 담장 너머로 주홍빛 감이 가지를 길게 드리운 풍경은 말 그대로 한 장의 멋진 그림이었고 나이를 많이 먹어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느껴지는 감나무는 찾아 올 자식을 기다리며 고향 집을 지키는 상징처럼 보였다.

  어려서 골목길을 쏘다니던 개구쟁이 아이들은 모두 자라 강남간 제비처럼 정든 시골집을 떠났지만, 감나무는 아직도 고향을 지키고 있는 모습에서 고향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감나무는 허리가 구부정하고 얼굴에 주름살 가득한 어른들의 분신처럼 보였다.

  축제장에 도착해 체험마당, 공연마당, 전시마당으로 나누어진 부스를 한 바퀴 돌았다. 축제장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상투적인 일회성 체험 부스와 먹을 것에 치중하는 먹자판 축제가 아니라 기존의 공공건물을 적절하게 활용해 축제장으로 만든 발상부터가 기발해 보였고 축제란 보는 즐거움, 먹는 즐거움, 참여하는 즐거움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는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축제장 공간이 다른 축  제보다 훨씬 넉넉하여 여기저기 마음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앉아서 휴식을 취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감 따는 장면을 직접 연출하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도 소문을 듣고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린 감나무 길을 걷는 것도 이색적인 체험이었다.
청도반시는 육질이 연하고 당도가 높은 우수한 품질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전국에서 유일한 씨없는 감으로서 먹기에 편하고 가공에 매우 유리한 장점을 가지고 있어 우리나라 떪은 감 중에서 가장 높은 차별성과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을은 말 그대로 축제의 계절이다. 지역마다 이런 저런 이름을 내걸고 축제를 하는 것이 어느 날부턴가 유행처럼 되었지만 어딜 가도 비슷 비슷한 프로그램과 불편한 시설과 가격만 비싸고 맛없는 음식으로 실망을 안고 돌아와야 했던 것과는 다르게 경북 청도에서 열린 반시 축제와 함께 한 경북으로의 여행은 지역의 특산물인 반기를 이용한 축제라는 잠이 돋보였다.

  지역민 스스로 축제의 주체로 참여하는 시대의 변화를 재치있게 수용한 청도 반시 축제가 몸의 저항력을 높이고 노화방지, 피로회복, 감기예방 등에 뛰어난 효능을 가지고 있는 반시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고 지역민의 잔치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축제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숨겨진 가능성을 발굴하여 노인과 젊은이라는 세대를 하나로 이어주는 정감 넘치는 한국의 오랜 정서를 대표하는 축제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 하나를 경북 여행을 끝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꿈꾸어 보았다.
 
  예던길 걷다 / 김정화

 “나 먼저 고삐 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
 퇴계 이황 선생의 시 일부이다 아마 봄날이었을 것이다. 복사꽃이 피어 청량산은 가히 무릉도원으로 변했을 것이다. 선생의 마음은 이미 그 무릉도원에 머무르기에 함께 가기로 약속한 친구를 기다리지 못하고, 낙동강 강섶 길로 말을 재촉한다. 건지산 기슭에 아롱지듯 붉게 핀 산도화로 말미암아 선생의 마음은 그지없이 설렌다. 그쯤에서 퇴계 선생은 말을 세우고, ‘擧鞭先入畵圖中’이라고 독백했을 것이다.

  500년 후, 어느 여름 날, 나는 말 대신 승용차를 타고 그 길을 찾아 갔다. 이육사문학관을 거쳐 원초마을을 가로질러 나가던 길은 잠시 산기슭을 타고 가다가 왼편 내리막을 탔다. 다시 4백여 미터를 앞으로 나아가서 단천교 삼거리에 닿았다. 예던길의 출발 지점이다.

  백운로에서 배턴을 넘겨받은 예던길은 비포장 흙길이었다. 꿈속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인 셈이다. 그 비포장 길은 걸어 들어가라는 표지인 것도 같았다. 그러나 늦은 시각에 찾은 것이라서 1km를 더 들어가 산비탈로 올라가는 길섶에 차를 세웠다. 

  산비탈 예던길을 걸어올라 가자, 정자 하나가 저만치 산 끝에 오도카니 섰다. 도산순례길 표지판도 그 옆에 세워져 있었다. 정자에 올라가 예던길을 눈으로 가늠해 보았다. 그 길은 한참 산을 뚫고 들어가다가 가파르게 산을 타고 내려갔다. 가파르게 내려가던 힘에 제동을 건 길은 낙동강을 끼고 농암종택으로 아스라이 이어졌다. 경치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 정자에서부터 예던길의 진면목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정자에 기대어 도산십이곡 한 수를 기억했다.

고인 (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봬
고인을 못 봬도 예던 길 앞에 있네.
예던 길 앞에 있으니, 아니 예고 어쩔꼬.

 선현이 행하던 길을 따라 가리라는 실천궁행의 도를 읊은 부분이다. 꿈속으로 들어가는 이 길의 이름을, 굳이 선현들의 삶을 좇아 살리라는 의지를 담은 ‘예던 길’로 정한 까닭은 무엇일까. 선생은 ‘독서는 산을 거니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는 선현의 가르침을 이해해야만 글을 읽었다고 인정하듯이, 산의 정취를 알아야 비로소 그 산을 유람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결국 학문을 닦는 길이나 자연을 완상하기 위해 걷는 길은 퇴계 선생에게 있어 모두 예던 길이었던 셈이다. 이 길을 예던길이라 한 연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청량산 전망대에 닿았다. 이 전망대는 건지산 한 줄기가 승천하는 용처럼 굽이져서 내닫다가 낙동강으로 급하게 떨어지는 산부리에 설치되어 있었다. 우선 눈에 들어온 것은 넓적한 돌판으로 된 표지석이었다. 이 돌판에는 ‘시인의 길’이라 새기고, 약도를 음각으로 그려 놓았다. 그리고 퇴계 선생이 이 길에서 만나는 명소를 소재로 시를 남겼다는 사실을 설명한 명문銘文을 새겨 놓았다. 그 돌판 옆에는 시비 셋이 서 있었다.

  長憶童時釣此間  어린 시절 여기서 낚시하던 일 늘 생각했는데,
삽年風月負塵환 삼십 년 긴 세월을 풍진 속에서 보냈다네,
我來識得溪山面  강산의 옛 모습을 나야 알아보건마는     
未必溪山識老顔  저 강산은 늙은 나를 알아볼 수 있을는지.

 셋 가운데 ‘미천장담’이다. 자연과 인간을 대비시켜 세월의 무상함과 더불어 불변하는 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이다. 어린 시절 예던길 가던 중에 만난 미천장담에 대한 추억도 더듬고 있다. 그 추억이 손에 잡힐 듯 아련하다.

  데크 형태로 지은 전망대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았다. 앞산, 장구목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들었다. 장구목은 살찐 육산이어서 중년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넉넉하게 보였다. 그 북쪽으로 멀리 밀려난 지점에 청량산 장군봉이 이내를 머금고 가파르게 솟아 있었다. 울창한 수림 사이로 흰 바윗덩이들이 언뜻언뜻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청량산의 바윗덩이들은 가파르고 견고해서, 일직선으로 뻗어간 시선에 팽팽한 긴장감을 돌게 했다. 그런가 하면 청량산은 주변의 뭇 산악을 압도하듯 위엄을 뿜어내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아도 가히 소금강답게 빼어난 산이었다. 퇴계 선생이 일찍이 ‘吾家山’이라 일컬은 그 산에는 청량사의 범종 소리가 속세의 먼지를 털어내기 위해 울릴 것이고, 오산당도 그 품에 조촐하게 숨어 있을 것이다. 천 년도 훨씬 전 김생이 바위를 갈아 글씨를 쓰던 터도 절벽을 뚫고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이다.

  청량산 들머리 옛 나루터, 나분들을 지난 낙동강은 청량산 수림과 바위들을 가슴으로 받아 안고 굽이져 흐르다가 협곡을 뚫는다. 이어서 강은  일직선으로 여울을 타면서 고산정을 지나친다. 고산정을 지나면서 곧장 낙동강은 크게 휘돌아 나가는 감입곡류를 이루며, 농암종택에 이른다. 다시 학소대 바위 절벽에 부딪힌 강은 또 한 번 휘어져서 경암에 이른다. 거기쯤에서 낙동강은 마침내 전망대에 선 사람의 시야에 들어온다.

  장구목 산발치를 돌아 경암을 스쳐 온 낙동강은 강섶에 들을 허락하지 않고 골짜기를 대부분 채우고 흘렀다. 강은 하늘을 닮아 에메랄드빛이어서 녹음 사이에 끼여 도드라지게 보였다. 다만 산 그림자가 드리운 강물은 산 빛을 띠었다.

  전망대에 머물던 발길을 거두어 산 속으로 난 예던길로 들어갔다. 풀이 자라긴 했으나, 길은 뚜렷하게 잘 나 있었다. 길 가장자리에는 칡이 나무들을 칭칭 감아 옭아매고 있었다. 자주색 칡꽃이 간혹 눈에 띄었는데, 잎사귀 속에 숨어 언뜻 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분홍 패랭이꽃이 풀숲 사이에 수즙은 듯 숨었고, 시절 늦은 애기똥풀도 노란 꽃을 피웠다. 저만치 산발치에는 마타리가 가는 대궁을 길게 뽑아 올린 끝에다 노랗게 꽃을 한창 피워냈다.

  예던길 깊은 곳으로 들어가니, 멧돼지들이 길을 파헤쳐 놓았다. 녀석들과 마주칠까 두려워 그쯤에서 발길을 돌려버렸다.

  미련이 남아 청량산 전망대에 다시 올라 사위를 들러 보았다. 한참 그러고 있으려니, 비로소 청량산과 낙동강의 진면목이 보이는 듯했다. 퇴계 선생의 안목에야 견줄 수 있겠나마는 어렴풋이나마 산이 그림으로 보이고, 강 역시 그림으로 보였다. 마침내 그림 속에 든 착각에 빠져들었다.

  정신을 수습하고 돌아보니, 긴 여름 해가 서산마루를 넘어서고 있었다. 서쪽 하늘 한 귀퉁이에 드리운 옅은 노을을 들치고 차를 돌려 몰았다.
장성재   blowpa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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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